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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셀 프루스트 저

     20세기 소설의 문을 연 작품이다. 리얼리즘에 바탕한 19세기 소설과는 판이한, 이른바 '의식의 흐름'을 좇아 인간의 내면을 탐색한 기념비적인 작품.「20세기 소설의 혁명」 「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점」이라는 수식이 붙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명저.

잠든 인간은 시간의 실을, 세월과 삼라만상의 질서를 자기 몸 둘레에 동그라미처럼 감는다. 꺠어나자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찾아, 거기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점과, 깨어날 떄까지 흘러간 떄를 삽시간에 읽어내는데, 종종 그것들의 열은 서로 얽히고 끊어지고 한다. 잠 못 이루는 반의 새벽녘, 평소에 잠자는 자세와 다른 자세를 취하고 독서하다가 잠들었을 때, 단지 팔의 위치가올라가 있는 것만으로, 태양의 걸음을 멈추게 하거나 뒷걸음질치게 할 수 있으므로, 눈뜬 순간에는, 이미 일어난 시간인 줄 모르고서 지금 막 잠든 줄로 여길 때도 있을 것이다. 보다 바르지 못한 어긋난 자세, 예컨대 저녁 식사 후 팔걸이의자에 앉아 옅은 잠이 들기라도 하면 무질서한 세계에 빠져 대혼란은 극에 달하고, 마법 의자에 앉아 시간과 공간 속을 전속력으로 달려, 눈꺼풀을 뜬 순간, 어쩐지 딴 나라에서 몇 개월 전에 쥐침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단지 침대에 눕고, 거기에다 잠이 푹 들어 정신의 긴장이 완전하게 풀리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정신은 나의 몸이 잠들고 있는 곳을 종잡지 못한다. 그리고 오밤중에 눈뜰 때,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첫 순간 내가 누군지조차 아리송할 때가 있다. 나는 동물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은, 극히 단순한 원시적인 생존감을 갖고 있을 뿐, 나의 사상은 혈거인의 그것보다도 더 빈곤하다. 그러나 이러한 때, 추억-지금 내가 있는 곳에 대한 추억이 아니고 지난날 내가 산 적이 있는 곳, 또는 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두세 곳의 추억-이 하늘의 구원처럼 이 몸에 하강하여,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이몸을 건져 준다. 나는 삽시간에 문명의 몇세기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첫째로 석유등잔, 다음에는 깃이 접힌 셔츠 따위들이 어렴풋이 눈에 비치는 영상에 의해서, 자아의 본래 모습이 점차로 꾸며져 나간다.


열번이 넘게 시도했지만 아직 정복하지 못한 책.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대한 묘사가 맘에 든다.

이인혁 : 잠자는게 뭐 그리..복잡하냐.... 피곤하면 자고...일어나면..또 하루가 시작 되는 거지... 빡신...하루... 또..하루.... 언제나...쉴 수 있을까? ㅡㅡ;; 이 오지랍 쟁이야~~~ (2003.12.2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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