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가 저 앞에 한 대 있다. 바퀴에 굴러온 길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떠나온 곳과 앞으로 발들이게 될 곳의 중간에서 그 자전거의 주인이 그 지나온 길들에 대한 이야기를 숨이라도 돌릴 듯 들려준다. 소음과 완벽하게 차단된 오직 바람을 가르는 숨소리를 동무 삼아 달리는 자전거 타기. 여행은 굳이 공간적 거리의 이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저자의 처연하고 시구같은 문장들이 자전거 바퀴살에 걸려든 햇살처럼 반짝인다. 그래서 아름다운 여행과 아름다운 각성과 아름다운 글이 어우러져 저 앞에 서 있는 자전거 폐달에 발을 딛고 싶게...
2년만에 가까스로 다녀온 해외 휴가에 함께한 책, 해외에서 우리나라를 같이 여행한 느낌이었다. 굵직 굵직한 어휘가 읽기를 느리게 만들지만 더 깊이 되새겨 볼 수 있게해 준 이야기들.
라인홀트 메스너는 유럽 알피니즘의 거장이다. 그는 히말라야에 몸을 갈아서 없는 길을 헤치고 나갔다. 그는 늘 혼자서 갔다. 낭가파르바트의 8,000미터의 연봉들을 그는 대원 없이 혼자서 넘어왔다. 홀로 떠나기 전날 밤, 그는 호텔 방에서 장비를 점검하면서 울었다. 그는 무서워서 울었다. 그의 두려움은 추락이나 실종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에 슬픔이 섞여 있는 한 그는 산속 어디에선가 죽을 것이었다. 길은 어디에도 없다. 앞쪽으로는 진로가 없고 뒤쪽으로는 퇴로가 없다. 길은 다만 밀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그는 산으로 가는 단독자의 내면을 완성한다. 그는 외로움에서 슬픔을 제거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외로움의 크고 어두운 산맥을 키워나가는 힘으로 히말라야를 혼자서 넘어가고 낭가파르바트 북벽의 일몰을 혼자서 바라본다.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서 철수했다.
스패너 뭉치와 드라이버 세트와 공기 펌프와 고무풀은 얼마나 사랑스런 원수덩어리인가. 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진대, 장비가 있어야만 몸을 사릴 수 있고, 장비가 없어야만 몸이 나아갈 수 있다. 출발전에 장비를 하나씩 점검해서 배낭에서 빼 버릴 때, 몸이 느끼는 두려움은 정직하다. 배낭이 무거워야 할 수 있지만, 배낭이 가벼워야 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무거움과 가벼움은 결국 같은 것인가. 같은 것이 왜 반대인가. 출발 전에 장비를 하나씩 빼 버릴 때 삶은 혼자서 조용히 웃을 수밖에 없는 비애이며 모순이다. 몸이 그 가벼움과 무거움,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짊어지고 바퀴를 굴려 오르막을 오른다.
빛 속으로 들어가면 빛은 더 먼곳으로 물러가는 것이어서 빛 속에선 빛을 만질 수 없었고 태백산맥의 가을빛은 다만 먼 그리움으로서만 반짝였다.
중세 경건 문학의 고전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라틴어 완역본으로 구성하였다. 세상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 존 웨슬리와 존 뉴턴 등 영적거장들의 회심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끼친 책, 본 회퍼 목사가 옥중에서도 손에서 놓지 못하며 묵상에 잠겼던 책 등 화려한 수식어를 단 『그리스도를 본받아』은 기독교의 본질을 담아낸 책이다. 이번 라틴어 완역본은 라틴어에서 영어를 거쳐 한국어로 중역된 것이 아닌, 라틴어에서 바로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어 원작의 감동을 보다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신심있는 영혼은 침묵과 고요 속에서 발전해 성서의 숨은 것들을 배웁니다. 바로 여기서 영혼은, 밤마다 자신을 적시며 깨끗하게 하는 눈물바다로 들어서는데, 영혼이 온갖 세속적인 소란에서 멀리 떨어져 살면 살수록 자신을 만든 창조주와 더욱 친밀해지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지인들과 친구들로부터 벗어나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거룩한 천사들과 더불어 접근하실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무시한 채 놀라운 일을 행하기보다는 은거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함이 더 나은 일입니다. 거의 두문분출한 채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는 일, 심지어 사람들을 보려고 하지 않는 일은 종교인에게는 칭찬받을 만하니다. 왜 그대는 가져서는 안될 것을 보려고 합니까. 세상과 세상의 욕망이 다 지나갑니다.(요일 2:17) 감각의 열망은 그대를 외출하도록 유혹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나면 답답한 양심과 흐트러진 마음 이외에 집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기쁜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나다가도 조금 있다가 슬픈 아침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육체적인 기쁨은 아첨하듯 나타나지만, 결국 그것은 물고 죽이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대가 이곳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다른 곳에서 볼 수 있습니까. 하늘과 땅과 모든 요소들을 보십시오. 만물은 이것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현재의 모든일을 본다면, 헌된 환상 말고 무엇이 더 있단 말입니까. 그대 눈을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로 높이 들어 그대의 죄악과 태만을 놓고 기도하십시오. 헛된 것은 헛된 사람에게 내맡기십시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들을 마음에 두십시오. 방문을 걸어잠그고 그대의 기쁨이신 예수님을 그대 자신에게로 부르십시오. 그분과 함께 방에 머무십시오. 이는 어떤 다른 곳에서도 그처럼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대가 외출하지 않고 어떤 소문도 전해듣지 않았다면, 한결 더 선한 평화속에 거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쯤 새로운 것을 듣는 일은 기쁨을 선사하지만, 그 이후로는 마음의 소란을 참아야 할 것입니다.
섬세하고 깊은 성찰, 따뜻한 시선의 작가 신경숙이 절정의 기량으로 풀어낸 엄마 이야기, 엄마를 통해서 생각하는 가족 이야기, 가장 큰 사랑 이야기.
세상 모든 사람은 엄마의 자식, 우리 모두에겐 나만의 엄마가 있다. 때로 좋기도 밉기도 고맙기도 원망스럽기도 한, 그러나 굳건한 땅처럼 분명하고 단단한 엄마. 어느날, 그 엄마를 잃어버린다. 나이 들고 몸도 성치 않은 엄마를. 서울 사는 자식들 편하라고 아버지 생신을 치르러 시골집에서 올라오던 길, 지하철 서울역에서 아버지 손을 놓친 찰나, 엄마는 꿈처럼 사라진다. 전단지를 돌리고 인터넷 광고를 하고 엄마를 보았다는 사람들을 찾아 온 식구가 사방을 헤매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가족들은 비로소 가장 낯익은 존재가 가장 소중한 것임을, 공기처럼 물처럼 대지처럼 자신과 함께 있어준 엄마의 무게를, 엄마의 빈 자리를 통해 확인한다.
엄마의 모든 소망과 꿈을 먹고 자란 큰아들, 친구처럼 의지하며 무람없던 큰딸, 자식 기르는 기쁨을 알게 해준 작은딸, 평생 살림의 책임을 떠안기며 밖으로만 돌던 아버지 들이, 엄마의 부재를 통해 각자의 이야기를 아프게 쏟아낸다. 이야기 속에서 식구들은 각자 자기만의 엄마를 추억하고, 그 속에서 조금씩 낯설지만 진정한 엄마의 모습을 발견해간다. 하나의 사람으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꿈과 소망을 안고 웃고 울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생명을 낳고 힘을 다해 키워낸 사람,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 다른 사랑을 마음으로만 품은 한 사람, 한 여성으로서의 엄마를. 엄마는 끝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과연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했을까. 어딘가에서 엄마는 온전히 존재할까. 우리 가슴속에 잠자는 가장 깊은 사랑을 일깨우며 진짜 감동을 전해주는 귀한 소설. 오늘, 우리 엄마가 그리워진다!
스무살의 그엑 졸업증명서를 가져다주려고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타고 온 엄마와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워 잔 그 숙직실, 그가 엄마와 그렇게 나란히 누워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거리를 향해 난 바람벽으로 찬바람이 쿨렁쿨렁 새어들어왔다. 나는 벽 쪽에 누워야 잠이 잘 온다, 엄마가 일어나더니 그와 자리를 바꿨다. 바람 들어오는데...... 그가 일어나 벽 쪽으로 가방과 책을 쌓아올렸다. 벗어놓은 옷가지도 쌓아올렸다. 괜찮다니까 그러는구나, 엄마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자라, 낼 또 일해야 할 틴디.
- 서울 처음 보니 어떠세요?
숙직실 천장을 보고 나란히 누워 그가 묻자 별것 아니구나, 엄마가 웃었다.
- 너는 내가 낳은 첫애 아니냐. 니가 나한티 처음 해보게 한 것이 어디 이뿐이간? 너의 모든 게 나한티는 새세상인디, 너는 내게 뭐든 처음 해보게 했잖어. 배가 그리 부른 것도 처음이었구 젖도 처음 물려봤구. 너를 낳았을 때 내 나이가 꼭 지금 너였다. 눈도 안 뜨고 땀에 젖은 붉은 네 얼굴을 첨 봤을 적에...... 넘들은 첫애 낳구선 다들 놀랍구 기뻣다던디 난 슬펐던 것 같어. 이 갓난애를 내가 낳았나...... 이제 어째야 하나...... 왈칵 두렵기도 해서 첨엔 고물고물한 네 손가락을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했어야. 그렇게나 작은 손을 어찌나 꼭 쥐고 있던지. 하나하나 퍼주면 방싯방싯 웃는 것이...... 하두 작아 만지면 없어질 것도 같구. 내가 뭘 알았어야 말이지. 열일곱에 시집와 열아홉이 되도록 애가 안 들어서니 니 고모가 애도 못 낳을 모양이라 해쌓서 널 가진 걸 알았을 때 맨첨에 든 생각이 이제 니 고모한티 그 소리 안 들어도 되네, 그게 젤 좋았다니깐. 난중엔 나날이 니 손가락이 커지고 발가락이 커지는디 참 기뻤어야. 고단할 때면 방으로 들어가서 누워 있는 니 작은 손가락을 펼쳐보군 했어, 발가락도 맨져보고. 그러구 나면 힘이 나곤 했어. 신발을 처음 신길 때 정말 신바람이 났었다. 니가 아장아장 걸어서 나한티 올 땐 어찌나 웃음이 터지는지 금은보화를 내 앞에 쏟아놔도 그 같이 웃지는 않았을 게다. 학교 보낼 때는 또 어땠게? 네 이름표를 손수건이랑 함께 니 가슴에 달아주는데 왜 내가 의젓해지는 기분이었는지. 니 종아리 굵어지는 거 보는 재미를 어디다 비교하겄니. 어서어서 자라라 내 새끼야, 매일 노랠 불렀데. 그러다 언제 보니 이젠 니가 나보다 더 크더구나.
이번 전주 여정에 무심코 한 손에 들고나간 책. 내려가고 올라오는 차에서 지하철에서 하루동안 읽었다.
한 번의 막힘없이 끝까지 읽도록 하는 신경숙씨의 솜씨에 감동하였고, 2인칭, 3인칭의 화자가 결국은 전지적 성격의 1인칭 화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라는 것에 한 번 더 놀랬다.